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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관련 논설....(딴지일보)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켠으론 답답하다......
이일을 어찌할꼬......




[논평] 미국산 소고기는 청산가리보다 안전합니다

2008. 5. 9. 금요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출범 100일도 되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 나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은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이라 아무도 사보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런 뻔한 책은 쓰지 않으련다.

도대체 뭐부터 콕 짚고 넘어가야 할까? 지금 미국산 쇠고기 개방 때문에 난리지만 이 광우병 파동은 온라인상에서만 횡행하던 국민들의 불만을 오프라인으로 전이시킨 임계점에 불과하다. 물이 100도씨의 온도라는 조건을 만나면 기화하듯 국민들의 불만은 미국산 쇠고기협상을 만나 폭발했다. 말인즉 국민들, 특히 어린 학생들의 분노가 행동으로 구체화된 것은 광우병때문 만이 아니다. 이미 냄비의 물은 끓기 직전까지 데워져 있었다.

뭐부터 비판하고 들어가면 적절할까? 교육정책? 한반도 대운하?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하나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의료보험 민영화? 삼일절 망언? 아니면 대미, 대일 굴욕외교? 강부자 내각? 공무원 때려잡기? 금산분리? 공기업민영화? 그것도 아니면 걸핏하면 틀리는 철자법을 꼬투리 잡을 수도 있겠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지레 지쳐 못할 지경이다. 하루에 한 번씩 입에 거품을 물어도 내 가난한 필력은 대통령과 청와대와 여당이 저지르는 사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 한다. 한 달을 물고 늘어져도 속이 시원치 않을 삽질을 기관총 난사하듯 시전하고 있으니 나는 방공호에 숨어서 4년하고 몇 개월 더 남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게 상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가난한 무명의 글쟁이라는 처지를 망각하고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이 지면을 빌어 이명박에 대한 비판의 물결에 물방울 하나를 더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물방울 투신의 이유는 도도한 역사적 ․ 애국적 흐름에 이 한 몸 보태려는 멸사봉공의 자세가 아니다. 순전히 나 개인의 스트레스 해소와,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서는 판에 나도 한마디는 거들었다는, 죄책감 해소를 통한 심리적 만족감이 그 목적이다.

그래서 나는 작금의 인터넷 공간에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려 한다. 글의 주제는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광우병 파동에 대한 것으로 좁히기로 한다.


다른 보따리와 마찬가지로 광우병 파동이라는 보따리를 풀어보면 한 무더기나 되는 삽질이 쏟아져 나온다. 이해할 수 없는 퍼주기 협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후속조치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같은 용도의 다른 물건을 비교했을 때 그 미적 가치는 대개 화려함의 차이보다는 형태 자체를 좌우하는 디자인 철학의 차이로 판단된다. 이른바 ‘사무실 의자’로 통하는 바로크식 물소가죽 소파보다 미니멀리즘이 구현된 실험적인 의자가 더 미적인 이유다. 바로크식 소파의 과시적인 장식은 그 의자의 주인이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증명할 진 모르나 그의 미적 취향이 가난한 미대생보다 조잡하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 유행이 지나서 버려진 지 10년이 훌쩍 넘은 바로크식 소파를 주워온 사람이 있다. 그의 취향은 대중의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촌스런 소파에 앉은 그는 일반대중이 루이 14세를 연상케 하는 자신의 아우라에 굴복하기를 바란다. 그는 바로 우리나라 대통령이다.

바로크식 소파의 윤기 나는 원목에 덕지덕지 붙은 장식의 정체를 살펴보자. 포도덩쿨문양은 철지난 삽질철학이다. 소프트웨어 첨단산업에 주력해야 할 21세기에 IT강국 한국의 경제를 대운하 삽질로 부흥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므로 청와대 컴퓨터를 보름이 넘도록 켜지 못해도 상관없다. 팔걸이 끝부분을 엿가락처럼 동그랗게 말아놓은 장식은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출동하는 경제영웅의 사명감이다. 천성이 공사판 십장인 그는 행정업무를 해야 할 시간에 밖을 싸돌아다닌다. 등걸이의 가죽을 수놓은 금박 단추는 내가 결정하면 모두가 그러마고 따라와야 한다는 근성이다. 그는 특정한 가치의 집단적 수용 대신 개인의 창조성과 상상력이 중요한 시대에 제 별명이 불도저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머리받침을 대신하는 메두사 머리의 정체는 군사적 권위주의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개방을 기점으로 폭발한 민심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불평불만을 떠드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


위 문장을 거꾸로 해석하면,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을 가만두지 않으려면 그들의 목소리가 ‘불평불만’이어야 한다. 이 근거를 만들어주기 위해 보수언론이 나섰다. 이들은 먼저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미국산 쇠고기 개방에 국한된 것으로 규정했다. 청와대는 이 바통을 이어받아 홈페이지를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문구로 도배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쇠고기 개방 이전에 불합리한 쇠고기 개방을 초래한 이명박 정부의 품질이다. 촛불문화제에 등장한 피켓 하나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광우병 걸려 의료보험 민영화로 돈 없어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주오.”

다음 단계는 광우병에 대한 안전성 논란을 근거 없는 ‘괴담’으로 치부하는 것. 이 단계에서 정부와 보수언론은 일제히 ‘과학적 근거’, ‘이성적 판단’, ‘정확한 사실’과 같은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시민대중을 ‘진실’로부터 소외시킨다. <동아일보>의 5월 2일자 사설은 논점일탈의 압권을 보여준다. 

“한미 쇠고기 협상이 지난달 18일 타결된 뒤 관련 부처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일련의 괴담에 처음부터 기민하게 대응했더라면 사태가 이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운을 뗀 후 “국정 쟁점에 대한 무기력하고 굼뜬 대응자세를 보고 있자면 왜 그들이 장관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답답해진다. 장차관들이 마른 땅만 밟으려 하다 보면 일부 세력의 불순한 선동에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며 항간의 <괴담>에 맞서 <진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한 장차관들을 질타한다. 여기서 동아일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장차관들이 진실의 편에 서 있다는 거다. 

마지만 단계는 ‘비이성적 공포’를 유발한 괴담의 뿌리를 추적하는 일. 그리하여 같은 사설에서 “미국 얘기만 나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흠집을 찾아내 부풀리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 세력의 정체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민족정론지 동아일보도 감히 밝히지 못한 그 세력은 과연 무엇일까? 좌파였으면 딱 좋았을 그 세력은 아무런 정치색도 없는 평범한 중고등학생들로 밝혀졌다.

이에 동아일보는 촛불문화제와 좌파를 연결 짓기 위해 다시 논점을 일탈하기에 이른다. “다시 ‘촛불’로 재미 보려는 좌파세력” 5월 4일자 사설 제목이다. 이렇게 해서 졸속협상으로 유린당한 국민건강권 문제는 좌파가 재미를 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파 동아일보가 본래의 논점에서 탈선한 이유, 다시 ‘빨간 색안경’으로 재미를 보기 위해서다.


 

이명박 정부를 향한 보수언론의 광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 먹고 사느라 바쁜 내 손가락만 아프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건 정부의 태도다. 보수언론들이 성난 시민의 목소리가 ‘근거 없는’ 불평불만임을 확인해주자, 정부는 이 불평분자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경찰은 여중고생들이 주축이 된 촛불문화제를 ‘불법시위’로 규정하고 관련 학생들을 사법처리할 것을 밝혔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더 이상 평화로운 집회를 생각할 수 없다. 경찰이 시민의 불법여부를 판단하는 그물망의 폭은 2MB 내각을 구성한 ‘인재’들이 통과한 그물망과 반비례하는 모양이다. 정부는 학생들을 설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부가 원하는 것은 학생들이 감히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주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교육의 목적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 이 원칙은 요즘 입시라는 지상과제에 매몰되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원칙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1 자체적으로 제안, 조직하고 2 지극히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며 3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난 세 차례의 촛불문화제는, 성숙한 민주사회의 시민운동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 교본이다. 이 상향적이고 평화적인 시민운동을 디자인한 철학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이상이며, 바로크식 소파의 눈높이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세련된 정치의식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학교는 어른들이 가르치지 못한 가치를 스스로 찾아내 구현해낸 학생들을 칭찬하고 존중하기는커녕 때려잡기로 작정하고 나섰다. 경찰은 감히 공권력에 반기를 든 학생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고, 교육부가 나서 각 학교마다 장학사들이 돌며 조심하지 않으면 경찰서에 끌려간다며 겁을 먹이면 교장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친다. 이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의사표현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의사표현을 할지라도 권력의 심기를 건드리면 밟힌다는 부조리한 현실이며, 이 현실을 거스르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역겨운 인생의 지혜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학생들을 자주적인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의식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이 학생들의 행동을 이해할 리가 없다. 이들의 머리는 어린 학생들의 생각이 대통령보다 사려 깊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은 선동된 것이 분명하다. “청소년 꼬드기는 ‘광우병 문자괴담’ 진원지 찾아내야” 5월 6일자 <조선일보> 사설이다. 선동의 실체를 밝혀라. ‘5월 6일 휴교’, ‘독도포기’ 문자의 진원지는 누구인가.

휴교소문과 대통령이 독도포기절차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근거 없는 낭설이다. 하지만 정부가 괴담의 진원지를 발본색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대신 거리로 나오고 싶어 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누가 말한 것처럼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국민과의 대화’도 거른 대통령이 ‘일본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해 친일적인 언사를 쏟아낸 이유가 무엇인지, 왜 어느 날 갑자기 주일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서 독도와 동해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이 삭제됐는지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온 국민이 다 아는 괴담의 진원지를 왜 찾아 헤맨단 말인가. 그 진원지는 청와대다. 괴담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안을 타고 유포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와 여당이 ‘괴담’이라고 치부하는 여론에 더 많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소 1억 마리 중 광우병에 감염된 것으로 판단된 소가 단 2마리에 그쳤다는 보고가 모든 소중 극소수만 그것도 육안으로 검사한 결과임을 아는 데 그렇게 많은 이해력이 필요할까? 미국산 소의 광우병 ‘확인’율이 일본보다 낮은 이유가 일본이 모든 소의 전수검사를 그것도 철저한 방법으로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게 특별한 일일까?

기자회견에 나온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 수입되는 모든 미국산 쇠고기가 100% 위험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말장난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90%의 확률로 위험하다면 괜찮다는 말인가? 문장의 어법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한국에 수입되는 모든 미국산 소는 조금의 위험성도 없어야 한다.”라고.

청와대 홈페이지는 미국인과 재미교포들이 매일같이 먹는 그 쇠고기가 온다고 선전한다. 한국이 수입하기로 한 30개월 령 쇠고기가 미국에서는 개 사료로도 금지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쏙 빠져 있다. 농림식품수산부의 홈페이지에는 “프리온은 병원균이 아니라 단백질이 변형된 것”이라 안전하다는 해명이 올라와 있다. 거짓말이다. 프리온이 병원균이 아닌 건 맞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다. 프리온은 세균과 같은 살아있는 세포가 아니다. 살아있지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 수백 도의 고온에도 제거되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반응은 딱 텔레토비 수준이다.

미국 쇠고기 아이 좋아~
촛불 싫어 싫어~

그래도 텔레토비 동산에 사는 꼬꼬마 네 마리는 서로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되도록 행복의 양을 공평하게 나누며 함께 살아갈 정도의 지능은 있다. 국민의 성난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일관하고 (국민들이) 죽어도 재협상은 없다고 외치는(미국을 재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합의문건을 공식적으로 고시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캠프 데이비드에서 기념사진 찍은 대통령의 얼굴이 말이 아니게 될 뿐이다.) 저 집단의 무뇌아적 행동의 원인은 뭘까?

그건 자신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게 해도 된다>는 명제에 당위성이 없다는 말이다. 즉 <이렇게 해도 되는> 이유가 합리적 절차에 의한 것이며 국가의 공익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말 되겠다. <이렇게 해도 되는> 이유는 자기들이 어떤 삽질을 해도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질곡의 10년을 뒤로하고 정권도 손에 넣었겠다,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도 여유 있게 삼켰겠다, 이제 더 이상 누구 눈치를 보리요? 총선 이후 삽질의 포스가 배가된 이유다. 그러면 저 텔레토비식 제스처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정해서 밀어붙이면 너네는 닥치고 따라오라는 뜻 되겠다. ‘머슴처럼 국민을 잘 섬기겠’다던 맹세 따위는 이제 와서 애써 상기할 필요가 없다.

“밤잠 설치는 MB” 동아일보 5월 7일자 기사 제목이다. “깊어가는 내우외환”에 고생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이 기사는 “이 대통령의 장점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상황이 어렵다 해서 옳다고 생각한 것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는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전하며 국민들에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것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제발 좀 흔들리라는 것이다. 잠 못 드는 MB의 적은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하는’ 정치적 세력이 아니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탄핵을 외쳐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굳건한 근성이다.


오야붕이 밤잠을 설치는데 꼬붕이 가만있을 수 없다. 한나라당의 얼굴마담 강재섭은 “오늘의 상황이 미국 상선 셔먼호가 100년 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와 같”단다. 그러면서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불 질러 버리고 척화비를 세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며 미국산 쇠고기 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척화파’로 규정한다. 강재섭의 머리는 셔먼호 출현을 우리 역사에 긍정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중이 불질러버리고 싶은 것은 셔먼호가 아니라 파란색 기와지붕을 얹은 현대판 경복궁이다. 셔먼호 선장이 누구처럼 바보도 아니고, 오라고 불러주는데 안 올 것 같은가?

청기와집 돌쇠 유인촌은 광우병 ‘괴담’을 퍼뜨리는 연예인들을 때려잡겠다고 나섰다. 아랫것들을 주인마님이 잡아서야 되겠는가. 그건 집사가 할 일이다. 탤런트 김민선이 마녀사냥의 표적이 됐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마시는 게 낳겠다는 김민선의 말은 이 “미친 발언”의 불순한 동기에 주목한 <조선일보>에 의해 ‘근거 없는 광우병 괴담’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물론 미국산 소고기가 청산가리보다 안전한 것은 사실이다. 저런 말을 한 김민선도 살면서 청산가리보다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저 말은 김민선이 공개적인 토론회에 나와서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의 블로그에 털어놓은 개인적 심정일 뿐이다. 청산가리는 미국산 소고기 개방에 대한 분노를 과장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조선일보>에 따르면 ‘앓느니 죽지’라는 표현은 오류다. 생물학적으로 앓는 게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유인촌은 자기가 연예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연예인들을 단속하는 데 의무감을 느끼는듯하다. 그런데 연예인들은 그의 졸병이 아니다. 그들은 연예인이기 이전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시민이다. 유인촌은 쇠고기 개방에 반대하는 연예인들이 자기에게 반항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문화체육부 장관은 반항하는 연예인들을 단속하고 학교는 반항하는 학생들을 단속하고 경찰은 촛불을 들고 반항하는 시민을 단속한다. 이렇게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대한민국의 정부와 공권력이 거꾸로 국민에게 반항을 일삼고 민주적 가치는 전복되어 2008년의 이명박 정부는 이십 년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군부독재의 냄새를 풍긴다.

지난 12월 국민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할 공직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굴리고 윽박질러 군기를 바짝 들게 해줄 사령관을 뽑았다. 그런데 그 사령관의 뇌 용랑이 2MB다. “가라, 적진으로!” 그런데 가라는 곳이 낭떠러지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적이 아니라 멍청한 지휘관이라던가. 화난 병사들이 방향을 돌려 사령관 관사로 진격하는 중이다. 이에 황소고집을 능가하는 미국산소고집을 자랑하는 사령관이 군악대장 유인촌이 뽑아대는 나팔소리에 맞춰 준엄하게 선언한다. “항명은 군율로 다스린다.” 이제 병사들에겐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레밍이 되어 장렬히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사령관의 폭주를 잠재울 것인가.

논설위원 필독(the.dog.on.the.field@gmail.com)




불펌해서 죄송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자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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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1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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